◆ 1세대 ‘싼티’ 버리고 3세대로
바야흐로 PB상품 3세대가 활짝 열렸다. PB상품은 그동안 일반 제조사 제품(NB)을 흉내내 가격만 싸게 내놓은 1세대에서 가격대별 등급을 나눠 세분화한 2세대를 거쳐 NB와 비교해도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 최고급에서 가격만 20~30% 낮춘 3세대로 진화 중이다. PB상품하면 떠오르던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이미지는 옛말이 된 지 오래.
‘품질’이 더해지면서 직장인과 주부들 사이에선 PB마니아층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 나홀로족인 손민혁씨(34)는 최근 편의점 PB상품에 푹 빠졌다. 출근하자마자 근처 편의점에 들러 PB 도시락과 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한 뒤 PB 빅 요구르트로 입가심을 한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손씨는 브랜드 커피전문점보다는 편의점을 찾아 PB로 나온 커피를 마신다.
퇴근길에도 마찬가지. 간편식 제품으로 나온 저녁거리와 TV를 보면서 먹을 간식거리, 집에서 사용하는 물티슈까지 모두 PB로 골랐다. 처음엔 단순히 ‘싼맛’에 끌려 PB제품을 이용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 골라먹는 재미까지 생겼다는 게 손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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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 피코크. /사진제공=이마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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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마트 서울역점 엔드캡. /사진제공=롯데마트 |
코코족인 주부 윤경아씨(39)도 그 중 한명. 코코는 창고형 할인매장 코스트코의 준말이다. 윤씨가 코스트코에 중독된 이유는 단 한가지. ‘커클랜드’라는 PB브랜드 때문이다. 커피부터 생수, 기저귀, 애견사료에 이르기까지 생필품라인을 갖췄을 뿐 아니라 저렴한 가격과 우수한 품질을 보유해 주부들 사이에서 평이 좋은 편이다.
윤씨는 “커클랜드제품을 사용해보니 품목별로 유명한 브랜드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며 “그 이후 커클랜드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져 대부분의 생필품을 해당 PB제품으로 구입해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기를 타고 커클랜드의 베스트셀러 상품인 휴지의 경우 지금까지 5450억원어치가 팔렸다. 더 놀라운 것은 7조원을 넘어선 커클랜드의 브랜드 가치. 이는 코스트코의 브랜드 가치인 10조5000억원과 비교해도 차이가 적은 편이다. 커클랜드가 코스트코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 대형마트, ‘프리미엄’ 달고 PB전쟁
PB 파워가 곳곳에서 증명되다보니 국내 대형마트들도 앞다퉈 PB상품을 통한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업체는 이마트. 2년 전, 이마트는 50년 전 탄생한 국내 PB 원조 브랜드인 ‘피코크’ 와이셔츠를 가정간편식브랜드로 부활시키며 PB경쟁에 가세했다.
당시 한우곰탕 등 60여개 상품에 붙은 ‘피코크’라는 이름은 현재 700여가지로 대폭 늘어난 상황.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차별화. 피코크는 기존 PB상품이 가진 편견을 깨기 위해 고급재료를 사용, 프리미엄 옷을 입고 소비자 공략에 나섰다.
가격이 비싼 편이지만 인기가 좋다. 피코크제품 중 120여개는 지난해 동일 제품군 매출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승승장구 중이다. 인스턴트가 주름 잡던 기존 간편식시장에 다양한 집밥 메뉴를 선보인 것이 주효했다는 평이다. 실제 피코크는 프리미엄 간편식이라는 입소문과 함께 론칭 2년 만에 이마트 가정간편식 전체 매출의 10%를 훌쩍 넘어섰다. 피코크 론칭 전 1525억원 수준이던 매출도 지난해 2000억원으로 늘었다.
이에 질세라 롯데마트도 기존 프리미엄 PB라인을 넘어서는 최상위 PB제품인 ‘프라임 엘 골드’(Prime L Gold)라는 브랜드를 출시하며 3세대 PB의 여세를 몰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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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트코. /사진제공=코스트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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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 /사진제공=BGF리테일 |
◆ 인기 오를수록 골목상권 '곡소리'
편의점과 대형마트들이 이처럼 PB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뛰어난 가격경쟁력 때문이다. PB상품은 중간 유통단계를 생략해 투자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아무래도 가격이 저렴하다보니 경기가 꽁꽁 얼어붙은 불경기엔 매출을 올리기가 쉽다. 대형마트들이 PB상품 비중 늘리기를 목표로 세우고 새 PB상품 만들기에 공들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PB상품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골목상권 유통업체들은 타격을 받는다는 점. 실제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서 판매 중인 인기 PB상품은 물, 우유, 화장지, 물티슈, 종이컵 등 주로 영세업체들이 납품하고 판매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PB상품은 대기업 규제를 교묘히 피한 ‘꼼수’ 제품인 셈이다. 과거 고추장, 순대사업 등에 뛰어들었던 대기업은 관련사업을 축소하거나 아예 철수했지만 편의점과 대형마트는 PB상품이라는 이유로 이 같은 제재에서 자유로운 몸이 됐다.
PB에 밀린 영세 자영업자들은 진열대에서도 밀린 지 오래다. 목 좋은 진열대엔 자사 브랜드를 앞세운 PB상품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 영세 유통업체 관계자는 “대형마트에서 NB상품을 판매할 때도 가격경쟁력 저하로 힘들었는데 PB상품의 비중이 커지면서 사업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했다”며 “진열대에서 보이기라도 하면 그나마 판매가 될 텐데 잘 보이는 자리는 대부분 유명한 PB제품이 차지하고 있어 설 곳이 없다”고 한탄했다.
전문가들은 3세대로 진화한 PB상품의 규제없는 성장이 되레 중소기업을 고사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건 하나의 현상이고 구조의 이면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품질 좋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과 중소기업을 죽인다는 이면. 앞으로 PB상품이 바람직한 변화로 '두얼굴' 논란을 넘어설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