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군중이 오가는 무표정의 공간 지하철역. 단순히 열차를 타고 내리던 이곳이 문화의 옷을 입고 시민에게 한발짝 더 다가갔다. 주변 지역의 테마를 담아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 지하철역 틈새공간이 그 무대다.

지난달 25~26일 이틀에 걸쳐 각양각색의 모습을 띤 서울의 이색 지하철역을 찾았다.

충무로영상센터. /사진=뉴시스 김인철 기자
충무로영상센터. /사진=뉴시스 김인철 기자

◆충무로역: 아늑한 매력의 ‘취향저격’ 지하영화관
“이번 역은 충무로, 충무로역입니다.”

지난달 26일 오후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가다 충무로역에서 내렸다. ‘나가는 길’ 안내판을 따라 계단을 오르는 순간 역 개찰구 안쪽에 ‘오!’하고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80여평 남짓한 통로에 기다란 마름모꼴처럼 생긴 이 공간은 ‘오!재미동’이라고 불리는 문화놀이터다. 이곳에서 10여명 남짓의 시민들이 독서를 하거나 영화를 감상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하철 구내에 이런 시설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충무로역 ‘충무로영상센터’. /사진제공=오!재미동
충무로역 ‘충무로영상센터’. /사진제공=오!재미동
“여기는 원래 복도였는데 그 복도의 반을 문화공간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구조가 복도형처럼 길쭉하게 이어져 있죠. 오!재미동은 다섯가지의 재미있는 다섯 공간을 의미하고요. 앞쪽부터 순서대로 아카이브(도서관 및 DVD방), 전시실, 창작지원실, 상영관, 편집실로 구성돼 있어요.” 오!재미동의 실무담당자가 이곳의 구조를 설명했다.
복도의 자투리 부분을 사용한 만큼 공간활용이 알차보였다. 아카이브에는 각종 서적과 잡지를 구비해놨다. 벽면에는 영화 DVD 4000여장이 진열돼 있다. 이 중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관리직원에게 건네면 DVD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 쿠션에 몸을 맡겨 PDP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보는 맛이 일품이다. 5대의 모니터가 설치돼 있으며 음성은 헤드셋으로 듣는다.

전시실은 전면이 오픈돼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이지선 작가의 개인전 ‘동그란 이야기들, 네모난 얼굴들, 구불거리는 시간들’이 펼쳐졌다. 영상과 설치물, 회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시실 뒤편 창작지원실에서는 작가가 작품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오!재미동의 백미는 상영관이다. 총 28명을 수용하는 이 상영관은 멀티플렉스처럼 웅장한 느낌은 없지만 아늑한 매력이 있다. 이곳에서는 1주일에서 보름 간격으로 정기상영전, 특별상영전이 열린다. 최근에는 성공을 꿈꾸는 무명 배우와 신인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라이프>가 상영됐다. 영화관람료는 기본적으로 무료다.


편집실에는 8대의 편집용 컴퓨터와 1대의 인코딩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이용요금은 시간당 1500원~3500원으로 시스템 사양 및 버전에 따라 다르다. 6㎜ 캠코더만 갖추면 자신이 찍은 영상을 직접 편집할 수 있다. 프리미어, DSLR 등 영상과 관련된 기초강좌도 매월 진행된다. 지갑이 얇은 대학생부터 무료한 어르신까지 모두가 문화인이 될 수 있는 충무로역의 오!재미동. 한때 영화산업의 요람이자 영화인의 메카였던 ‘충무로’의 면모가 이곳에 짙게 남아있는 듯하다.

성수역 ‘슈스팟 성수’. /사진=뉴시스 고승민 기자
성수역 ‘슈스팟 성수’. /사진=뉴시스 고승민 기자
성수역 ‘슈스팟 성수’ . /사진=뉴시스 고승민 기자
성수역 ‘슈스팟 성수’ . /사진=뉴시스 고승민 기자


◆성수역: ‘한땀 한땀’ 만든 수제화 역사 한눈에
지난달 25일에는 ‘구두메카’ 성수동의 연결통로인 2호선 성수역을 돌아봤다. 성수역에서 내리는 순간 승강장 양옆 스크린도어가 발길을 붙잡는다. 스크린도어는 온통 수제화 작업 중인 장인의 모습, 각종 구두 등의 그림으로 장식됐다.

계단을 타고 한층 내려와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1번 출구부터 4번 출구까지 150m에 이르는 지하철역 통로에 성수동 수제화 골목의 역사와 구두 제조과정이 좌르르 펼쳐졌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우리나라 수제화의 역사, 수제화 제작공정, 구두제작 작업실 등. 그야말로 구두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공간은 ▲우리나라 수제화 역사 흐름을 조망하는 ‘구두지움’ ▲성수동의 공간·사람·역사를 소개하는 ‘슈다츠’ ▲수제화 제작공정과 작업실을 재현한 ‘구두장인 공방’ ▲창의적 사고를 유도하는 ‘다빈치구두’ 등 총 4가지 주제로 꾸며졌다.

수동 구두재봉틀, 구두 제작용 망치, 칼, 송곳 등 수십년간 장인들의 손을 거친 도구들이 손잡이마다 반들반들 닳아 있다. 저 도구들로 얼마나 많은 구두를 만들었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구두 장인이 ‘톡톡’ 구두수선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통로 벽면에는 성수역 주변에 오밀조밀하게 흩어진 수제화업체의 지도가 붙어있다. 수제화업체의 지도를 보며 어느 매장으로 갈까 고민하는 시민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수제화 구입을 위해 성수동을 찾았다는 대학생 이모씨(25)는 “편한 구두를 사려고 잠깐 들렀는데 성수역 전시공간을 둘러보면서 매일 신는 신발의 많은 것을 알게 됐다”며 “잠시나마 구두 장인들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고 구두와 관련된 여러가지 에피소드도 흥미롭게 읽었다”고 말했다.

소소한 재미가 있는 '감성 자극'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소소한 재미와 생활 속 지식을 제공하며 승객과의 감성 소통을 추진하는 지하철역을 소개한다.

왕십리역. /사진=박효선 기자
왕십리역. /사진=박효선 기자
왕십리역: ‘응답하라 6080’ 추억영상

5호선 왕십리역 방화방향 승강장에서는 1960~80년대의 영상이 상영된다. 주로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민들이 이곳 ‘문화극장’을 이용한다. 문화극장은 <대한늬우스>와 <다시 보는 문화영화> 등을 상영하는 ‘사색의 공간’과 당시 정부의 정책과 정보를 전했던 KTV의 방송이 나오는 ‘정보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정보의 공간 뒷면에는 1930년대 무렵부터 현재까지 왕십리 지역의 변화와 발전상을 볼 수 있는 사진자료가 전시됐다. 1960년대까지 성동교를 지나다니던 경성궤도 기동차의 모습과 1996년 지하철 5호선 전구간 개통식 등 왕십리가 서울 동부권의 교통 중심지로 성장해온 주요 과정을 볼 수 있다.
녹사평역. /사진=박효선 기자
녹사평역. /사진=박효선 기자
▷녹사평역: 지하에서 꽃 피운 거리예술

6호선 녹사평역 지하 4층 대합실에서는 높이 2.7m, 길이 51m의 크기로 제작된 초대형 그래피티(벽면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리는 그림)가 지하철 승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가 레오다브가 ‘지하철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주제로 역 직원, 기관사, 정비직원, 청소근로자 등 지하철 운영을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을 다양한 색상과 형태로 표현했다. 김구, 안창호, 유관순, 윤봉길 등 10명의 독립운동가 모습도 그래피티로 재구성했다.

독립문역. /사진=박효선 기자
독립문역. /사진=박효선 기자
▷독립문역: 태극기로 수놓은 맞이방

3호선 독립문역은 맞이방(대합실)을 온통 태극기로 수놓았다.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기 그리는 법, 우리나라 태극기 변천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4번 출구로 나가는 길 벽면에는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들어가기 전 독립문역을 지날 때 우리 선열들의 독립 의미를 되새겨보자.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설합본호(제421호·제42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