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장이 유병자 실손보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뉴스1DB
최훈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장이 유병자 실손보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뉴스1DB
보험사들이 실손의료보험으로 또 골치를 썩고 있다. 정부가 오는 4월부터 추진하는 건강보험보장 확대정책인 ‘문재인케어’가 실손보험료 인하를 압박하는 가운데 손해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병력자 실손의료보험(유병자 실손보험)까지 도입해서다.

◆기존 상품 기죽일 ‘유병자 실손’
금융위원회는 1월, 보험업계와 1년간의 협의를 거쳐 만든 유병자 실손보험을 오는 4월부터 판매한다고 밝혔다. 이 상품은 실손보험 가입문턱에서 좌절하던 유병자를 위한 실손보험으로 최근 5년간의 치료이력을 2년으로 대폭 낮췄다.

또 총 18개의 심사항목도 6개(병력 관련 3개 사항·직업·운전여부·월소득)로 줄였다. 이를테면 60대 보험수요자가 3년 전 질병을 앓았더라도 4월부터는 2년간 치료이력을 가입요건으로 보기 때문에 유병자 실손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5년간의 발병·치료 이력을 심사하는 중대질병도 10개에서 1개(암)로 줄였다. 암은 의료진이 완치판정을 하기까지 5년간 관찰해야 하고 다른 중대질병과 달리 전이나 합병증이 광범위해 단기심사가 어려운 점을 감안했다. 이밖에 당국은 고혈압 등 약을 먹는 경증 만성질환자도 유병력자 실손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하는 등 가입문턱을 크게 낮췄다.

그러나 보험사들은 금융당국의 유병자 의료복지정책에는 동의하면서도 관련 실손보험 출시는 달갑지 않은 눈치다. 기존에 출시한 유병자보험 상품과 실손상품이 중복될 수 있어서다.

자료=금융위원회
자료=금융위원회

대다수의 보험사는 지난해부터 정부의 유병자보험 판매 장려정책에 따라 정액형 유병자 건강보험을 대거 출시했다. 지난해 6월 라이나생명이 업계 최초로 출시한 당뇨·고혈압 유병자 전용 상품은 출시 2개월 만에 1만여건 이상 판매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한화생명과 교보생명은 유병자도 가입이 가능한 종신보험 상품을 내놨으며 ABL생명도 3개의 질문에만 대답하면 가입이 가능한 유병자보험을 내놨다.
보험사 입장에서 보면 유병자보험은 보험료가 비교적 고가로 형성돼 초회보험료가 상승하는 장점이 있다. 새 국제회계기준(IFRS17) 도입에 앞서 보장성보험 판매를 늘리려는 보험사 입장에서도 유병자보험은 나쁘지 않은 상품이다. 최근 고혈압과 당뇨를 앓는 30세 이상 인구가 증가하는 점도 유병자보험시장의 메리트를 높이는 요인이다.


하지만 당국이 유병자를 위한 실손보험 상품 출시를 오는 4월로 계획하면서 보험사의 유병자보험 상품은 가입자 수요를 잃을 위기다. 물론 정액형 유병자보험은 종신, 연금, 건강보험 등 유병자 실손보험보다 보장 내용이 다양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실손보험보다 고가로 책정된 보험료나 대중성 등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

보험사 관계자는 “보험료 부담을 줄인 유병자 실손보험이 출시되면 기존에 출시한 보험상품 가입률은 어떤 식으로든 요동칠 것”이라며 “4월 이후 유병자 실손보험 판매 통계를 봐야겠지만 기존 정액 상품 판매가 줄고 실손가입자가 늘면 수익성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통계 없는데…” 보험사는 손해율 걱정

보험사도 당국의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다. 금융위·금융감독원·보험개발원·보험업계가 이 상품에 대해 1년이나 논의한 것은 보험사 부담을 최대한 줄이려 했기 때문이다. 당국은 가입문턱을 낮추는 대신 보험사의 부담을 줄여줬다. 유병자가 실손보험에 가입해 혜택을 받더라도 최소한 30%의 자기부담률을 설정했다. 또 최소 자기부담금(통원 2만원·입원 10만원)도 납부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보험사는 손해율이 치솟을 가능성이 높아 우려한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보험상품은 관련 통계가 3년 정도 축적돼야 적정 보험료 책정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보험사들이 유병자 관련 보험 출시에 나선 지 얼마 안돼 정확한 통계가 아직 없는 상태다.

보험사 관계자는 “유병자 실손보험에 대한 통계가 없어 손해율이 얼마나 될지 책정하기 어렵다”며 “일반 실손보험 상품의 보험료 인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유병자 실손 부담까지 보험사에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당국이 무작정 상품만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2014년 출시된 노후실손은 50~75세를 위한 실손보험이지만 높은 자기부담금으로 3년간 가입자가 2만6000명에 그치며 사실상 실패했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보험국장은 “노령자들은 보험료 낼 돈이 없어 아무리 좋은 보험을 제공하더라도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당국이 간과하고 있다”며 “상품만 제공해서는 실효성이 없다. 비교적 고가의 보험료와 함께 자기부담금이 적지 않은 유병자 실손보험도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보다 현행 실손보험의 과잉진료 방지와 비급여 표준화, 손해율 검증, 보험료 산정 등 혁신적 개선을 통해 실손보험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5호(2018년 1월31일~2월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