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선규 SK 와이번스 단장. (SK 제공) © 뉴스1
류선규 SK 와이번스 단장. (SK 제공) © 뉴스1

(서귀포=뉴스1) 이재상 기자 = '덕업일치.'
'덕질'과 '직업'이 일치했다는 신조어로, 마니아급 관심사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은 사람을 일컫는다.

PC통신 하이텔에서 야구가 좋아 밤샘 글을 쓰던 20대 청년은 야구단 프런트가 됐고, 결국 세월이 흘러 단장까지 올랐다. 프로야구 SK 와이번스의 마지막 단장이자, 새로운 신세계 그룹 야구단의 초대 단장인 류선규(51) 단장의 이야기다.


지난 3일 SK 스프링캠프지인 제주도 서귀포 강창학야구장서 만난 류 단장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선수들의 훈련 장면뿐만 아니라 여러 시설 등을 꼼꼼하게 둘러봤다. SK 간판을 달고 진행하는 마지막 스프링캠프에서 그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있엇다.

류 단장은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일주일 사이 폭삭 늙었다"며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겠다"고 웃었다. 그는 일주일 새 신세계 그룹으로의 인수 및 매각건 등으로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류 단장은 '덕업일치'란 말을 꺼내자 눈빛을 반짝였다.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꼬마는 당시 선린상고와 경북고의 경기를 처음 전파사 앞에서 본 뒤 야구와 사랑에 빠졌다. 류 단장은 아직도 고교야구 결승전서 박노준이 홈으로 슬라이딩 하다 부상당한 장면이 생생하다.

그는 "뉴스를 틀었는데 당시 여고생들이 박노준의 부상에 울고, 병문안을 갔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고 껄껄 웃었다.

그는 1982년 MBC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원년의 개막전을 보며 MBC의 팬이 됐다. 연장전에서 터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 홈런은 어찌 보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류 단장은 1990년대 PC통신 '하이텔'에서 야구 고수로 통했다. 학사장교를 했던 그는 퇴근 후 집에서 하이텔에 글을 쓰는 재미에 푹 빠졌다. 잠실구장서 야구를 보고 관전평을 적는 게 가장 큰 낙이었다.

"취미로 시작했는데 사람들 반응이 꽤 좋았다"고 전한 그의 당시 아이디 'myLG'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PC통신을 통해 연재됐던 판타지소설 '퇴마록'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류 단장의 야구 분석글은 호평을 받았다. 그는 "야구 쪽에서 퇴마록만큼 인기가 있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20년 전 SK 와이번스에서 일하던 류선규 단장의 모습. (류 단장 제공) © 뉴스1
20년 전 SK 와이번스에서 일하던 류선규 단장의 모습. (류 단장 제공) © 뉴스1

류 단장은 하이텔 내 있던 'LG 게시판'에 칼럼 형태로 글을 썼고, 결국 구단의 러브콜을 받았다. 당시 그가 글을 쓰면 LG 홍보팀에서 프린트를 해서 팀장, 단장, 사장까지 보고를 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군 장교 제대하고 1997년 LG 구단의 정식 제안을 받고 LG 트윈스 프런트로 입사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다. 유일한 취미인데 업으로 하게 되면 그렇지 않나. 몇 달에 걸쳐서 답을 안 드리다 결국 (입사를)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류 단장은 "당시 선수 스카우트 관련해 비판적으로 쓴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입사하고 나니 스카우트팀에 있는 분들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구단 관계자 입장에서는 내가 미운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후 LG에서 나와 2001년 지금의 SK 와이번스에 입사하게 됐다. 2001년 12월 17일. 류선규 단장은 자신의 SK 입사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 신문에 야구 땅표(기록표)와 타격 10걸 등을 줄줄 외우고 다녔다. 그때는 기억력이 참 좋았다"고 했다.

SK에 들어가게 된 사연도 재미있다. LG 구단서 나와 자신의 꿈이었던 스포츠 마케팅 등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 그는 "성문종합영어로 공부해서 문법은 잘 했는데 말(회화)이 안 되더라"고 씩 웃었다. 때마침 SK에서 연락이 왔고 2번째 야구단에 들어가게 됐다.

2007년 제주도 스프링캠프서 포즈를 취한 모습.. (류선규 단장 제공) © 뉴스1
2007년 제주도 스프링캠프서 포즈를 취한 모습.. (류선규 단장 제공) © 뉴스1

류 단장이 SK에 입사할 때 이야기 했던 것 중 하나가 "마케팅을 배우고 싶으니 훗날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으로 연수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SK에서 그의 명함은 17개다. 마케팅부터 홍보팀, 육성팀, 데이터 분석팀 등 안 거친 곳이 없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았고 여러 파트를 돌며 두루 공부했다.

류 단장의 바람대로 그는 2003년 SK 준우승 이후 이듬해에 미국으로 연수를 갈 수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7개월 머무는 동안 모든 야구장을 다 돌았다. "마이너리그 싱글A부터 메이저리그 구단까지 동부와 중부에 있는 야구장은 다 갔다. 15년 이상 된 중고차를 사서 몰고 다니면서 직접 구단의 이벤트 장면 등을 사진 찍고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축적된 결과물이 2007년 SK가 내세웠던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다. 상대적으로 비인기 구단이었던 SK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스포테인먼트'를 앞세워 서서히 주목 받았다.

무엇보다 SK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공을 들였다. 그는 "인천 팬을 위해 2002년 '꿈의 유니폼(삼미 슈퍼스타즈)데이'와 2007년 '태평양 (돌핀스)데이' 등을 했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연고지 이전으로 상처 받은 SK팬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고 전했다.

야구가 좋았던 어린 아이는 그렇게 꿈을 쫒았고, 시간이 흘러 단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류 단장은 "여전히 이 일이 즐겁다"고 웃었다. 그는 "다양한 역할을 했지만 그때마다 '재미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루틴하게 한 가지만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 내겐 큰 자산이 됐고 참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류 단장은 "1년에 144일(144경기)을 스트레스 받는 것이 이 일의 숙명"이라고 덧붙였다.

류선규 SK 와이번스 단장. (SK 와이번스 제공) © 뉴스1
류선규 SK 와이번스 단장. (SK 와이번스 제공) © 뉴스1

류 단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업으로 삼으려고 하는 지금의 10대 20대 친구들을 향한 현실적인 조언도 잊지 않았다. 막연한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취미를 업으로 하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막연히 야구가 좋아서 야구단에 오면 실망할 수 있다. 현실은 다르다. 직장은 즐기는 곳이 아니다. 프로의식을 가져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류 단장에게 'SK'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내 청춘을 바친 팀"이라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 했다.

"지금의 SK를 일궈냈는데 갑자기 문을 닫으려고 하니 눈물이 났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약이다. 오히려 신세계 구단으로 변화하는 것이 상당한 도전이고 기회가 될 것이란 확신이 있다. 이 도전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류선규 단장은 내달 간판이 신세계 그룹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기대감도 나타냈다.

그는 "좋은 기억이 있는 팀이지만 간판이 바뀌었다고 우리가 했던 4번의 우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세계에서 우승하면 'V1'이 아닌 'V5'로 계속된다"면서 "내 역할은 20년 간 했던 것을 신세계에 잘 접목시켜서 극대화 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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