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ws1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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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비명 소리가 들려요, 무슨 일 날 것 같아요"

오후 7시40분쯤 서울 강남구 도곡지구대 관할 지역에 가장 비싼 아파트에서 112 신고가 들어왔다. 이웃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고 뭔가 깨진 것 같다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출동한 경찰들이 막상 신고된 집 문 앞에 도착하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도 두드리고 귀를 대봤지만 인기척도 안 느껴졌다. 이때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문을 강제 개방해도 될까.

'경찰이 당연히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지금 당장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당사자의 구호 요청이 들어온 것도 아닌 상황이다. 확실한 근거 없이 무작정 문을 따고 들어가면 경찰도 역으로 '주거침입죄'로 고소당할 수 있어 적극 대응이 어려운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지난 8일 오후 도곡지구대에서 만난 팀장 장관승(54) 경감은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출동하는 지구대원들은 본서 근무 경찰관들보다 법률을 더 넓게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경감이 매일 근무 시작 전 팀원들을 불러 최근 이슈되는 사건들 위주로 법률 관련 교육을 하는 이유다.


역삼동 유흥가 사이에 위치해 112신고 건수가 많아 바쁘기로 소문난 도곡지구대는 지난해 7월 장 경감이 들어온 이후로 팀원들의 사기에 변화가 생겼다. 올해 7월 도곡지구대 5팀은 '상반기 지역 경찰 엄지척팀'으로 인증패를 받으며 팀워크와 실력을 인정받았다.

8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곡지구대에서 나온 장관승 경감 모습. ⓒ News1
8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곡지구대에서 나온 장관승 경감 모습. ⓒ News1

◇ "이론과 실무는 다르다"

교육의 효과는 실제로 현장 팀원들의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당시 문을 열어주지 않던 40대 초반의 남성은 "나도 당신들만큼 법을 아는 유명 로펌 변호사다. 경찰이 영장도 없이 집에 들어오는 건 직권남용이다"라며 화를 냈다. 법조인이 법적 용어를 사용하며 따져 묻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충분히 움찔할 수 있지만 당시 김모 순경이 차분히 설명할 수 있던 이유는 팀장의 '법률 강의' 덕분이었다.

김 순경은 "'살려달라'는 구호 요청이었다면 현장 도착하자마자 소방 지원으로 문을 강제 개방할 수도 있지만, 그날 같은 상황에서는 사실 어떤 법적 근거로 들어갈 수 있는지 스스로 따져본 적이 없었다"며 "마침 팀장님이 알려주신 내용이 떠올라 강제조치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말했더니 그분도 수긍하고 문을 열어줬고, 안에 여성이 무사한지 빠르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 경감이 아침에 조항을 읊으며 알려주는 내용은 딱딱한 이론 공부가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자칫 헷갈릴 수 있는 내용들이다. 만약 김 순경이 형사소송법에 따라 현행범 체포를 위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면 문제가 됐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안에서 어떤 범죄가 일어났는지 파악되는지 모르고, 변호사 말대로 영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의 생명과 연관된 구조 활동의 일부라면 경찰관직무집행법 제7조에 따라 적극 조치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순경이 되려면 형법과 형사소송법만 최소 1년 이상 공부해야 하지만 실무와 이론은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일선에 오고 많이 느꼈어요. 공부가 부족하면 현장에서 피해자의 말만 듣게 되고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해 옳은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사건 유형마다 관련 법령과 판례를 검토해 두고 모아둡니다."

장 경감은 수사관 시절부터 이어온 공부 습관으로 오늘날 후배들을 가르칠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또 5년 전부터 시작된 지구대 현장 경험담들을 엮어 지난달 22일 에세이를 출간했다. '꼴통 장 경감 지구대 가다:강남 지구대 24시'는 일선 경찰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고민과 알아야 할 법률 지식이 담겼다.

지난달 22일 출간된 장관승 경감 에세이.  ⓒ News1
지난달 22일 출간된 장관승 경감 에세이. ⓒ News1

◇ "모든 사건의 첫 단추 끼우는 지구대 경찰의 고민"

"지구대는 즉시 조치해야 하는 무임승차·무전취식·재물손괴 등 사건부터 사기·횡령·문서위조와 같은 고소·고발 건도 들어와요. 경찰서 안에 형사과, 수사과, 아동청소년과처럼 분야대로 사건을 맡아서 처리하도록 구분되지 않고 엇갈린 주장들만 현장에서 끊임없이 펼쳐지죠. 일반 시민들은 소위 말하는 '마동석' 같은 형사만 기억하지만, 모든 사건의 첫 단추를 끼우는 지구대 경찰들이 처벌과 보호 등 다양한 문제 사이에서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책에서 스스로 '꼴통'이라고 말한 장 경감은 1992년 순경 공채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지구대 일에 애정을 갖고 책을 냈지만 서울경찰청, 경찰청 사이버범죄 수사대, 금융범죄수사팀 수사관 및 팀장으로 근무하며 굵직한 사건들도 20년 넘게 처리해 왔다.

지금은 일상에서 자주 보이는 '국제 전화입니다' 표시, '친구가 아닐 수 있으니 금융거래 주의하세요' 알림서비스, 실종자 자동추적 시스템 등은 모두 장 경감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국제 발신 전화가 왔을 때 보이스피싱을 차단하기 위해 제안한 방법이다.

장 경감은 중요 범죄 피의자를 검거했을 때의 희열과 자긍심도 잊을 수 없지만, 자신이 교육한 내용을 상황에 곧바로 적용하고 자신감을 키워가는 젊은 후배들을 보며 느끼는 뿌듯함도 크다고 말했다.

"수사만 할 때는 몰랐는데 이혼 소송 시 근거를 남기려고 일부러 112 신고를 하는 사람부터 단지 사익을 위해 공권력을 이용하려는 간 큰 사람들까지, 주변에 기상천외한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벌써 팀장만 24년째지만 지구대에 근무하면 할수록 배워야 할 것이 더 많고, 그런 사람들을 실력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학원가로 유명한 이 동네에서 제일 늦게까지 공부하는 곳이 우리 지구대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