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살배기 아이를 키우는 회사원 서씨(32)는 최근 점심시간만 되면 주차장에 있는 차에서 낮잠을 잔다. 아이를 돌보느라 집에서 밤잠을 설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점심식사는 편의점에서 구입한 샌드위치 등 간단한 요깃거리로 때우기 일쑤. 서씨는 “점심시간에라도 잠시 자두지 않으면 밥을 먹은 뒤 잠이 몰려와 도저히 오후 업무를 감당해낼 수 없다”며 “점심시간에 30분이라도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만한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한다.
# 또 다른 직장인 노씨(29)는 업무 특성상 야근과 저녁 술자리가 잦다. 술자리가 길어지면 새벽까지 이어지는 것이 다반사라 다음날이면 숙취와 쏟아지는 졸음에 시달린다. 노씨는 최근 직장 선배로부터 ‘비타민 주사’를 추천받은 후 술을 마신 다음날 점심시간이면 식당이 아닌 병원으로 향한다. 노씨는 “불 꺼진 병실에서 1시간30분 정도 주사를 맞으며 잠을 자고 일어나면 술도 깨고 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이 든다”며 “주사를 자주 맞는다는 게 꺼림칙하지만 직장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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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갈구하는 직장인들
직장인들이 ‘낮잠’을 갈구하고 있다. 잡코리아가 최근 남녀 직장인 201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97.3%가 근무시간에 졸음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쏟아지는 졸음은 업무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졸음이 업무에 지장을 준 적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76.4%가 ‘그렇다’고 답한 것.
이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이 가장 잠을 갈구하는 시간은 점심식사 이후였다. 응답자의 90% 가까이가 오후 12시 이후 극심한 졸음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많은 직장인은 잠을 깨기 위해 커피 등 각성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음료에 의존했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갖거나 담배를 피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시에스타(Siesta) 도입을 찬성한다고 답했다. 시에스타란 직장에서 공식적으로 낮잠을 허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현재 근무하는 회사에서 시에스타를 도입한다면 찬성하겠냐’는 질문에 응답자 90.1%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찬성하지 않는다’고 답한 이들은 9.9%에 그쳤다.
서울시는 지난해 8월부터 ‘낮잠제도’를 도입했다. 전날 야근한 직원이나 건강이 좋지 않은 직원 등을 대상으로 한다. 시가 마련한 낮잠제도는 점심시간 이후인 오후 1시부터 6시 사이에 쉬고 싶은 직원이 부서장에게 신청해 허가 받은 후 30분에서 1시간 동안 공식적인 휴식을 취하는 제도다. 낮잠을 잔 시간 만큼 저녁시간에 일을 보충하면 된다.
예컨대 감기몸살로 오후 근무가 버거운 서울시 직원이 오후 2시부터 40분간 낮잠을 잤다면 오후 6시40분까지 근무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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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곳 없어 룸살롱·병원 전전
하지만 이는 서울시청 근무자에만 해당되는 사항일 뿐 일반직장인에게는 꿈 같은 얘기다. 이 같은 제도나 시설은 국내 어느 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수의 직장인들은 피로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식사를 포기하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1시간가량의 ‘낮잠’을 택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마음 편히 잠을 청할 만한 장소가 없다. 아무리 업무 외 시간인 점심시간이라고 해도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 것은 이래저래 눈치가 보인다.
위 사례의 서씨는 “사무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게 더 낫겠지만 상사의 눈치가 보여 불편하다”며 “지하주차장이라 공기가 탁하지만 개인공간이 보장되는 차에서 자는 게 한결 편하다”고 말한다.
서씨와 같이 차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기 때문에 이런 공간을 갖기란 쉽지 않다. 서씨의 동료 가운데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10분가량 ‘쪽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
이에 점심시간 동안 ‘눈 붙일 곳’을 찾아 헤매는 직장인이 많다. 회사가 밀집한 지역에는 자연스레 ‘이색 낮잠 장소’가 등장한다. 여의도와 역삼동 주변에는 저녁시간 술을 파는 유흥업소가 낮 시간을 이용해 영업하는 룸카페가 인기다. 많은 직장인이 커피나 차를 마시기보다는 낮잠을 잘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다. 유흥주점 소파에 누워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청할 수 있어서다. 밀폐된 구조상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뿐더러 베개로 사용할 수 있는 쿠션과 담요 등도 제공된다.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카페 '낮잠'은 피곤한 직장인을 위해 해먹 등을 설치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해 낮잠을 잘 수 있도록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많은 직장인이 위 사례의 노씨처럼 수액을 맞으며 낮잠을 청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실제로 기자가 오피스빌딩이 밀집한 청계천·종각 주변의 병원을 돌아다녀 본 결과 주로 ‘○○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병원은 너나할 것 없이 ‘만성피로 회복, 숙취 해소’ 등의 글귀와 함께 이 같은 주사를 처방하고 있었다.
비타민주사, 마늘주사, 칵테일주사, 활력주사, 두뇌활성주사, 숙취해소주사 등 이름도 다양한 주사들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1회 투여 시 3만~10만원의 비용이 들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대부분의 병원이 직장인들로 가득 찬다.
수많은 직장인이 점심시간 동안 병원침대를 꿰차고 누워 주사를 맞기 때문에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점심시간에 주사를 맞기가 쉽지 않다.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러한 정맥영양주사의 경우 혈관에 영양제를 바로 투여하는 것으로 숙취해소제나 비타민 등을 먹는 것에 비해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 주사를 맞는 데 소요되는 40분에서 1시간30분가량을 병원 침대에 누워 잘 수 있다는 것도 직장인이 많이 찾는 이유다.
한 의사는 “(영양주사가) 부작용이 있다는 보고서는 없지만 어떤 것도 과하면 좋지 않다”며 “2주에 한번 정도는 괜찮지만 그 이상의 횟수를 맞으면 건강에 좋을 리 만무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주사를 맞기 위해 내원하는 직장인에게 이에 대해 설명하지만 일주일에 두차례 이상 방문해 주사를 요구하는 직장인이 많은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