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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이미지투데이 |
◆조선은 '일부다처제'의 나라였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조선 시대의 왕가와 양반가의 첩 제도를 보고 "일부일처제가 아닌 일부다처제 사회다"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조선은 '일부다처제'가 아닌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엄밀히 말해서 조선은 '일부일처제' 사회이면서 '처첩제'를 병행한 것이다. 즉, '일부다첩제'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 '처첩제'라는 표현은 경국대전을 통해 명문화됐다.
조선은 공식적 복혼제는 아니지만 일부일처제에 대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 첩제도가 등장했다. 첩제도는 첫 배우자인 본처와의 혼인관계는 그대로 지속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첩을 두고 있는 관습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첩제도는 사회적으로 공공연하게 용납됐다.
물론 일반적으로 첩의 자식은 '서얼'이라고 해서 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됐지만, 일부지역에서는 조상제사에도 참여하고 재산상속도 받는 등 본처의 자식들과는 별다른 차별 대우를 받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조선 시대의 왕가와 양반가의 첩 제도를 보고 "일부일처제가 아닌 일부다처제 사회다"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조선은 '일부다처제'가 아닌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엄밀히 말해서 조선은 '일부일처제' 사회이면서 '처첩제'를 병행한 것이다. 즉, '일부다첩제'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 '처첩제'라는 표현은 경국대전을 통해 명문화됐다.
조선은 공식적 복혼제는 아니지만 일부일처제에 대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 첩제도가 등장했다. 첩제도는 첫 배우자인 본처와의 혼인관계는 그대로 지속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첩을 두고 있는 관습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첩제도는 사회적으로 공공연하게 용납됐다.
물론 일반적으로 첩의 자식은 '서얼'이라고 해서 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됐지만, 일부지역에서는 조상제사에도 참여하고 재산상속도 받는 등 본처의 자식들과는 별다른 차별 대우를 받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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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는 '남녀평등' 사회?
고려 시대에는 장녀가 재산을 물려 받거나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를 통해 단순히 고려는 "남녀가 평등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나 고려 시대 역시 '남존여비'는 존재했다.
남존여비란 남성의 권리나 지위 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어 존중하고 여성을 천시하는 사상 및 태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권리가 강하고 남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볼 수 있다. 남녀가 각기 능력과 특질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으며 생명을 유지하던 원시공산시대에는 남녀의 생리적 특징이나 자연적 분업은 당연지사로 인정되어 그것이 귀천의 조건으로서 생각되는 일은 없었다. 그 후 사유재산제가 발달함에 따라 남녀의 경제적 지위의 차이가 가부장제를 만들었고, 사회의 계급적 분열에 의한 남존여비 풍습이 생겼다.
남성의 권리나 지위가 여성보다 우위에 있어 여성을 업신여기던 관행 등의 남녀불평등 현상은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조선 시대의 유교이념이 널리 퍼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남존여비라는 말로 용어화하고 관행이 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또는 이념적·도덕적으로 강조됐다.
유교적 이념보다는 불교적 이념이 짙은 고려 시대를 두고 남녀가 평등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정확히 말해서 고려 시대가 '남녀평등'한 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 사상이 강하지 않았다 정도다. 가정에 따라서 아들과 딸을 차별 두지 않고 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벼슬길에 오르거나 여러 사회적 제도에 있어서는 분명 차별이 존재했다.
고려 시대에는 장녀가 재산을 물려 받거나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를 통해 단순히 고려는 "남녀가 평등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나 고려 시대 역시 '남존여비'는 존재했다.
남존여비란 남성의 권리나 지위 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어 존중하고 여성을 천시하는 사상 및 태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권리가 강하고 남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볼 수 있다. 남녀가 각기 능력과 특질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으며 생명을 유지하던 원시공산시대에는 남녀의 생리적 특징이나 자연적 분업은 당연지사로 인정되어 그것이 귀천의 조건으로서 생각되는 일은 없었다. 그 후 사유재산제가 발달함에 따라 남녀의 경제적 지위의 차이가 가부장제를 만들었고, 사회의 계급적 분열에 의한 남존여비 풍습이 생겼다.
남성의 권리나 지위가 여성보다 우위에 있어 여성을 업신여기던 관행 등의 남녀불평등 현상은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조선 시대의 유교이념이 널리 퍼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남존여비라는 말로 용어화하고 관행이 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또는 이념적·도덕적으로 강조됐다.
유교적 이념보다는 불교적 이념이 짙은 고려 시대를 두고 남녀가 평등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정확히 말해서 고려 시대가 '남녀평등'한 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 사상이 강하지 않았다 정도다. 가정에 따라서 아들과 딸을 차별 두지 않고 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벼슬길에 오르거나 여러 사회적 제도에 있어서는 분명 차별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