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예찬-하] 맛에 웃고 가격에 울고


평소 밥보다 면(麵)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하루에 한끼는 꼭 면 음식을 즐기며 삼시세끼를 전부 면으로 때우더라도 기꺼이 젓가락을 들 수 있다.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면 음식을 두루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냉면을 가장 선호한다. 잘 삶은 고기국물에 동치미국물을 섞어 살얼음이 끼도록 차갑게 식힌 새콤달콤한 육수를 쫄깃한 면과 함께 한 모금 들이키면 요즘 같은 이른 무더위의 불쾌함이 단번에 씻긴다.


주로 맵고 짜고 달고 신 자극적인 맛의 함흥냉면을 즐기지만 가끔은 평양냉면을 찾는다. 슴슴함 뒤에 가려진 재료 고유의 맛이 은근한 중독성을 일으켜서다.


을밀대 외관. /사진=이한듬 기자
을밀대 외관. /사진=이한듬 기자

◆재료 본연의 슴슴함

기자가 평양냉면을 처음 접한 것은 6년 전이다. 자극적인 맛을 배제한 특유의 슴슴하고 밍밍한 육수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고 들었지만 처음부터 입맛에 꼭 맞았고 이후로도 꾸준히 챙겨먹는 별미가 됐다.

서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평양냉면 전문점이 여럿 있다. 이 가운데 임의로 5곳을 선정해 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메뉴는 기본적인 물냉면으로 정했으며 비록 맛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서 최대한 평양냉면의 맛에 집중하기로 했다.

가장 처음 찾은 곳은 종로구 내수동에 위치한 ‘평가옥’이다. 성남시 분당에 본점을 둔 평양냉면 전문점인데 서울시내에만 7곳의 분점을 낼 정도로 인기가 많다. 내수동 분점은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있어 평소에도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의 육수는 ‘소, 돼지, 닭’ 고기육수를 섞어 만든다. 면을 맛보기 전 육수를 들이켜자 입안 가득 육향이 퍼지면서 면에서 배어나온 메밀의 구수함이 코를 자극했다. 면은 함흥냉면 면발에 비해 굵다. 정확한 메밀함유량은 알 수 없으나 적당히 탄력 있으면서 쫄깃하되 질기지 않아 굳이 가위를 사용하지 않아도 앞니로 충분히 끊어먹을 수 있다.

고명으로는 얇게 편으로 썬 소수육와 돼지편육, 가늘게 찢은 닭고기가 올라간다. 어슷썰은 절인 오이와 배채, 청양고추도 함께 있어 이것저것 고명을 달리해 먹기 좋다. 전체적으로 맛이 좋았으나 간이 좀 세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여의도에 위치한 ‘정인면옥’이다. 광명시에서 입소문으로 유명세를 떨친 뒤 여의도로 규모를 키워 옮겼다. 이곳의 육수는 소고기향이 가득하다. 마치 맑은 나주곰탕 국물을 차갑게 식혀먹는 것처럼 목넘김 뒤에 올라오는 감칠맛이 좋다. 겨울에는 육수 그대로 따뜻하게 데워 국밥으로 먹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명으로 올라간 아롱사태는 꽤 두께가 있는데 부드럽게 씹히면서 소고기 특유의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면은 메밀국수의 면처럼 굵은 편이다. 적당한 메밀향이 나면서 질기지 않기 때문에 후루룩 먹기 좋다. 더 진한 메밀향을 즐기고 싶다면 순면을 선택하면 된다.


을지면옥. /사진=이한듬 기자
을지면옥. /사진=이한듬 기자

◆맛객 흉내에 얇아지는 지갑
세 번째 가게는 마포에 위치한 ‘을밀대’다. 일반적인 평양냉면집이 고기육수를 쓰는데 을밀대는 한우사골과 양지가 육수의 베이스라고 한다. 냉면을 주문하고 기다리면 곧바로 주전자에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사골국물을 넉넉히 담아 내주는데 한모금 들이켜면 몸을 보양하는 기분이다.

물냉면 육수는 사골국물에 고기육수와 동치미 등을 배합한 듯 다양한 향이 은은하게 나며 살얼음이 껴있어 이가 시릴 정도의 시원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고명으로는 소고기수육과 오이채, 절인 무, 얇은 배 한 조각이 올라간다.

이곳의 면 역시 일반적인 함흥냉면에 비해 굵은 편이다. 면은 메밀향이 상당히 구수하게 퍼지는데 식감은 적당히 탄력 있으면서 쌀밥을 씹듯이 압축된 느낌이 난다. 개인적으로 이곳의 평양냉면을 가장 좋아한다.

다음으로 충무로에 위치한 ‘을지면옥’을 찾았다. 과거 이곳을 추천한 지인에게 ‘냉면육수 맛이 식은 콩나물국 같다’고 말했다가 ‘맛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맛을 보니 고기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육수는 소고기 사태와 돼지고기가 베이스이며 고명 역시 소수육 한점과 돼지편육 두점이 올라간다. 메밀향이 가득한 면은 앞서 경험한 평양냉면집에 비해 가늘지만 질기지 않고 앞니로 툭툭 끊긴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종로 낙원상가 근처에 위치한 ‘유진식당’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어 식사시간대에는 항상 긴 줄이 이어진다.

소고기육수와 동치미가 적절히 배합된 물냉면 육수는 다른 곳에 비해 슴슴함이 덜하고 다양한 맛이 난다. 얇게 편으로 썬 소수육과 함께 고명으로 올린 무는 일반적인 절인 무가 아니라 동치미 무다. 면은 적당히 탄력 있어 씹는 재미가 있다. 평양냉면 초보가 먹어도 무리 없을 맛이다.

5곳의 평양냉면집을 돌며 천천히 맛을 보니 마치 TV에 나오는 맛칼럼니스트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전문적인 맛객을 좇기에는 지갑사정이 여의치 않다. 평양냉면의 가격이 대부분 1만원을 훌쩍 넘기 때문.

실제 기자가 방문한 곳도 유진식당(8000원)을 제외하면 평가옥 1만3000원, 정인면옥 1만원(순면 1만2000원), 을밀대 1만2000원, 을지면옥 1만2000원 등으로 다소 가격대가 높았다. 사리추가 역시 5000~7000원 수준이다. 여기에 동행자가 있거나 곁들임 메뉴를 더할 경우 순식간에 4만~5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맛있다고 무작정 즐기기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평양냉면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는 가격이지 않을까. 저렴하고 맛깔스러운 평양냉면집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96호(2019년 6월11일~17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