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그룹과 MBK파트너스 연합이 고려아연과 미국 정부의 현지 제련소 건설에 제동을 걸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진다. 투자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고려아연 지분을 일부 확보한 것을 아연 주권 포기로 몰아가며 사업 본질을 흐리고 있다. 고려아연은 미국 정부에 대한 유상증자를 통해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동시에 기술·운영 주체로서 한미 공급망 협력을 공고화 중이란 평가를 받는다. 오히려 해외자본을 앞세워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영풍·MBK 행보가 회사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영풍과 MBK는 고려아연 이사회가 결의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대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앞서 고려아연이 미국 내 10조원 규모 제련소 건설 투자 및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안건을 의결한 것에 반발하는 조치다. 고려아연은 미국 정부·방산업계와 합작법인(JV)을 세워 제련소를 설립하는데, 이를 위해 JV향 신주 약 10%를 발행해 2조8578억원을 제련소 건설비로 조달한다.
영풍·MBK는 해당 과정에서 JV가 고려아연의 주주가 되는 것을 비난한다. 미국에 지분을 내주고 현지 대규모 제련소를 짓는 게 아연 주권을 포기하는 행태라는 거다. 미국 정부가 주주로 참여할 경우 기업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고 고유 기술 유출 우려를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경영권 분쟁 속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경영진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특정 3자에게 지분이 배정된 만큼 자금 조달을 매개로 경영권을 유지하려 한단 입장이다.
고려아연의 제련소 로드맵과 미국 현지 시장 흐름을 고려하면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높지 않다. 고려아연의 미국 내 제련소 건설은 현지 자회사인 크루시블 메탈즈를 통해 진행될 예정이다. 현지에서 제련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주체는 고려아연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일각의 기술 유출 및 아연 주권 우려와는 거리가 먼 구조다.
JV의 지분 확보 역시 우려할 부분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갖는 고려아연 지분율은 약 10%에 불과하다. 이 지분으로는 경영권이나 기술 통제권 등을 행사할 수 없다. 이번 지분 확보는 미국 정부가 단순한 사업 파트너를 넘어 '한미자원동맹 공동체'가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미국 정부의 주주 참여는 미국·고려아연 모두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평가다. 트럼프 정부는 출범 이후 핵심 산업 기업 지분을 지속해서 확보했다. 최근 6개월간 100억달러(약 14조7000억원) 이상을 투입해 US스틸·인텔·MP머터리얼즈·트릴로지메탈스·웨스팅하우스 등 광물·IT·에너지 기업의 지분이나 워런트를 확보했다.
고려아연도 미국 정부와 협력 관계가 더 굳건해지면서 현지 투자·사업 여건이 개선될 수 있다. 이번 사업에서도 미국 정부와 재무적 투자자들이 전체 자금의 90%를 투자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9월 영풍·MBK의 적대적 M&A를 저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자금을 쓴 바 있다. 미국의 적극적인 투자가 반가운 이유다. 고려아연은 외부 자금 조달로 재무안정성과 사업 기회를 모두 확보하게 됐다.
영풍·MBK의 이번 지적이 '내로남불'이란 비판을 받는다. 영풍은 지난해 9월 해외 사모펀드인 MBK를 끌어들여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를 추진했다. 회사 경영진 동의 없이 주식을 장내에서 대량으로 사 모으거나 공개 매수해 기업 경영권을 가로챌 심산이었다.
MBK가 올해 홈플러스 기업회생 신청 사태, 롯데카드 개인정보 유출 사건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면서 정치권도 이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김상훈 의원은 지난 10월14일 국감에서 MBK의 고려아연 인수전에 대해 "대한민국의 중요한 기술을 해외자본에 매각하게 되는데 이를 국민들이 눈 뜨고 지켜봐야만 하느냐"며 "사모펀드가 국가기간산업에 해당하는 기업을 인수하는 과정에는 별도 방책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도 우려됐다. 당초 MBK가 고려아연 인수에 활용하려 했던 MBK 6호 펀드의 경우 중국투자공사(CIC) 지분 일부가 포함돼서다. 고려아연의 핵심 기술이 중국으로 흘러가게 될 경우, 공급망 안정은 물론 산업 보안 전반이 위협받을 수 있단 분석이다.
한편 고려아연은 미국 제련소를 짓기 위해 내년 부지 조성을 시작으로 건설에 착수, 2029년부터 단계적 가동과 상업 생산에 돌입한다. 연간 약 110만톤의 원료를 처리해 54만톤 규모의 최종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생산 품목은 총 13개 제품으로 아연·연·동 등 산업용 기초금속을 비롯해 ▲금·은 등 귀금속 ▲안티모니, 인듐, 등 핵심 전략광물 ▲반도체 황산이 생산된다.
최근 미국은 전기차, 배터리,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산업과 전략산업의 성장으로 아연, 연, 구리(동) 등 기초금속과 안티모니, 인듐 등 전략광물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전쟁부 및 상무부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해 추진되는 고려아연의 미국 제련소 건설은 미국 정부의 공급망 자립·경제안보 강화, 나아가 한미간 공급망 협력의 모범사례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