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열린 잉글랜드 리그컵 4라운드 아스날과 리버풀의 경기에서 리버풀 선수들(붉은색 유니폼)이 알렉스 옥슬레이드 체임벌린의 골이 터지자 다같이 모여 기뻐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지난해 10월 열린 잉글랜드 리그컵 4라운드 아스날과 리버풀의 경기에서 리버풀 선수들(붉은색 유니폼)이 알렉스 옥슬레이드 체임벌린의 골이 터지자 다같이 모여 기뻐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정확하게 서른번의 시즌이 지났다. 우승의 기쁨 속 태어났던 리버풀 팬은 30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팀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리버풀이 지난 26일(한국시간)30년 만에 잉글랜드 1부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 출범은 물론 1989-1990시즌 이후 최초다.
위르겐 클롭 감독이 리버풀에 부임한 2015년 이후 리버풀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발전해왔다. 확실한 신념을 가진 리더 아래에서 확실한 방향성과 색을 띈 채 전진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리버풀은 지난 2년에 걸쳐 보여줬다. 리버풀의 전력을 고려할 때 당분간 이런 상승세는 이어질 전망이다.

리그에서 리버풀과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는 팀이 있다. 바로 아스날이다. 아스날은 2015-2016시즌 가장 완벽한 우승 기회를 잡았다가 눈 앞에서 놓쳤다. 이후 아스날이 가는 길 앞에는 줄곧 내리막 뿐이다. 이번 시즌에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은 고사하고 클럽대항전 진출 여부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지난 5년, 리버풀이 꿈 같던 우승컵을 거머쥐는 사이 아스날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2015년 여름,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나

아스날은 아르센 벵거 감독 임기 말년인 지난 2015년 이후 줄곧 흔들렸다. /사진=로이터
아스날은 아르센 벵거 감독 임기 말년인 지난 2015년 이후 줄곧 흔들렸다. /사진=로이터
2015년 여름을 맞이하는 양 팀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아스날은 오랜 '암흑기'를 떨쳐내고 다시 우승 경쟁에 나선다는 희망이 가득했다. 2013년부터 메수트 외질, 알렉시스 산체스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밟았다. 이를 원동력으로 직전 시즌을 3위로 마감, 이름표처럼 달라붙던 4위 징크스를 벗어났다. 2015년 여름에는 베테랑 골키퍼 페트르 체흐까지 데려와 약점으로 지목되던 뒷문을 보강했다. '지금이야말로 우승의 적기'라는 분위기가 구단 안팎으로 흘러나왔다.
반면 리버풀은 손에 거의 움켜쥐었던 우승을 놓친 타격에 비틀거리던 차였다. 리버풀은 2013-2014시즌 우승 문턱에서 맨체스터 시티(맨시티)에게 역전을 허용했다. 지금까지도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영원한 주장' 스티븐 제라드의 치명적인 실책이 나왔던 바로 그 시즌이었다. 이 시즌 이후 '주포' 루이스 수아레스가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으며 순위는 단숨에 6위로 추락했다. 2015년 여름에는 라힘 스털링까지 이적했다. 또다시 중위권을 멤돌 것이라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바로 이 시즌부터 양 팀의 운명은 정확히 180도 바뀐다. 아스날은 이른바 '레스터 시티 동화'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우승 가능성이 높았던 시즌을 날려버린 아스날은 이후 하는 일마다 삐걱거렸다. 레스터 우승의 일등공신인 공격수 제이미 바디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이적 완료 단계에서 협상이 틀어졌다. 대신 영입된 루카스 페레스와 아사노 타쿠마는 각각 부상과 비자 문제 때문에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여기에 토마스 로시츠키, 미켈 아르테타, 잭 윌셔 등 오랜 기간 팀을 지켰던 선수들이 빠져나가며 리더층이 흔들리는 악재가 겹쳤다. 
결국 아스날은 버릇처럼 지키던 4위권을 넘어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알렉상드르 라카제트,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등 재능 넘치는 선수들이 줄줄이 영입됐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그 누구도 아스날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에 다시 올려놓는 데 실패했다. 

그 사이 22년 동안 팀을 지켰던 아르센 벵거 감독이 아스날을 떠났다. 새롭게 부임한 우나이 에메리는 선수들과의 불화설만 잔뜩 남긴 채 2019-2020시즌 중간 경질됐다. 바로 그 2015년 팀을 떠났던 미켈 아르테타가 감독으로 돌아왔을 때는 팀 전반이 망가질데로 망가진 상태였다. 2020년 6월26일 현재, 아스날은 10승13무8패 승점 43점으로 리그 9위에 머물러있다. 사실상 이번 시즌은 팀 개편을 준비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지난 2015년 10월 리버풀에 부임한 위르겐 클롭 감독이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해보이고 있다. /사진=로이터
지난 2015년 10월 리버풀에 부임한 위르겐 클롭 감독이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해보이고 있다. /사진=로이터
리버풀의 행보는 사뭇 달랐다. 2015-2016시즌 초반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브랜든 로저스 감독이 사임했다. 구단 수뇌부는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감독직을 막 내려놓은 참이던 위르겐 클롭을 새 감독으로 점찍고 그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첫 시즌 팀 상황을 점검한 클롭 감독은 2016년 여름부터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기존 잉여자원들을 정리하며 측면공격수 사디오 마네, 미드필더 조르지오 베이날둠 등을 영입했다. 이듬해에는 또다른 측면공격수 모하메드 살라와 수비수 버질 반 다이크가 안필드를 밟았다. 파비뉴, 나비 케이타, 앤드류 로버트슨, 알리송 베케르 등 지금까지 중요 자원으로 뛰는 선수들 대부분 클롭 감독 부임 이후 영입된 선수들이다. 하나같이 왕성한 활동량과 빠른 속도, 정확한 킥 능력을 지닌 선수들이었다.

이들이 뭉친 리버풀은 2016-2017시즌 4위로 시즌을 마감해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에 복귀했다. 살라가 영입된 2017-2018시즌 다시 한번 4위로 숨을 고른 리버풀은 2018-2019시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4강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나 1차전 0-3까지 뒤지다가 2차전 4-3 대역전극을 일궈낸 건 유럽 축구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었다. 그리고 리버풀은 2019-2020시즌, 리그 종료를 7경기나 남겨둔 상황에서 30년 만의 우승을 마침내 확정지었다.


아스날은 리버풀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갖지 못했다

리버풀 공격수 사디오 마네와 모하메드 살라, 호베르투 피르미누(왼쪽부터). 세 선수는 리버풀 반등의 핵심으로 손꼽힌다. /사진=로이터
리버풀 공격수 사디오 마네와 모하메드 살라, 호베르투 피르미누(왼쪽부터). 세 선수는 리버풀 반등의 핵심으로 손꼽힌다. /사진=로이터
리버풀의 성공을 단순히 거액의 투자로 일궈낸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다. 맨시티와 맨유, 첼시 등과 맞서기 위해 구단 차원에서 큰 돈을 선수 이적료로 썼고 이것이 효과를 봤다는 주장이다. 상대적으로 구단주의 지원이 적은 아스날로서는 선수 한 명의 몸값이 1000억원대를 호가하는 오늘날의 축구계에서 경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여기에 상충한다.
리버풀이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돈을 쓴 것은 사실이다. 가장 좋은 일례가 반 다이크다. 리버풀은 반 다이크를 사기 위해 당시 수비수 역대 최고이적료인 7500만파운드(약 1115억원)를 사우스햄튼에 지불했다. 알리송(5600만파운드)과 케이타(5270만파운드), 파비뉴(3930만파운드) 등을 사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투자됐다.

하지만 아스날이 그 정도 돈을 쓰지 못했느냐고 묻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15년 여름 이후 리버풀과 아스날의 최대 이적료 선수 탑3를 살펴보자. 리버풀은 반 다이크와 알리송, 케이타에게 총 1억8370만파운드(약 2735억원)를 투자했다. 같은 기간 아스날은 니콜라스 페페, 오바메양, 라카제트를 사며 1억7200만파운드(약 2560억원)를 지출했다. 두 구단이 마음 먹고 투자한 비용 자체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스날은 자카와 무스타피를 영입하는데 각각 3500만파운드씩을 썼다. 외질에게는 5억원이 넘는 주급으로 장기 재계약까지 맺었다. 반면 리버풀은 비슷한 가격에 마네(3400만파운드)와 살라(3690만파운드)를 데려왔다. 그리고 두 구단의 투자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현 시점의 리그 순위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리버풀은 단순히 돈을 많이 쓰기만 한 게 아니다. 본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선수에게 충분히 합당한 가격을 지불했다.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의 옆에는 스티븐 제라드(위)와 조던 헨더슨으로 이어지는 주장들이 있었다. /사진=로이터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의 옆에는 스티븐 제라드(위)와 조던 헨더슨으로 이어지는 주장들이 있었다. /사진=로이터

리버풀과 아스날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여기서 출발한다. 클롭 감독은 자신만의 확고한 전술 스타일인 '게겐 프레싱'을 주창한다. 명확한 색을 지닌 감독을 데려온 리버풀은 그 감독에게 맞춰 모든 걸 집중했다. 감독이 원하는 선수, 감독의 전술에 최대한 들어맞는 선수, 그리고 약점을 가장 확실히 보완할 수 있는 선수. 이것이 리버풀이 그동안의 이적 시장에서 보여준 큰 틀의 선수 선택 방식이었다. 즉, '클롭'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마치 소용돌이가 돌듯이 구단 구성원 전체가 응집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반면 아스날은 이런 구심점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2015년을 지나며 벵거 감독은 서서히 커리어 말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벵거 감독이 밀던 '아름다운 축구'는 극단적 점유율 전술인 티키타카와 클롭, 시메오네로 대표되는 강한 압박 수비 전술에 결과적으로 뒤쳐졌다. 하지만 벵거는 자신의 팀 운용 방식을 고집했다. 날카로운 감독들이 주도하는 유럽 최상위 축구계에서 홀로 선수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고 본인의 전술을 고수했다. 그러다가 커리어 말미에는 느닷없이 백3 전술을 들고 나오는 등 스스로도 명확한 기준을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단을 20년 넘게 이끈 감독이 흔들리자 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수단 내부에서나마 구심점 역할을 맡을 이가 거의 전무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필요하다면 동료들에게 고함을 질러가며 정신무장을 시키고 자신이 앞장서서 상대와 부딪혀 싸울 인재가 아스날에는 없었다. 패트릭 비에이라와 티에리 앙리가 연이어 팀을 떠난 이후 10여년 넘게 지속된 문제였다. 잠시 페어 메르테사커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선수 본인의 기량이 급속도로 떨어지며 실패했다. 스티븐 제라드-조던 헨더슨의 계보가 공고히 이어진 리버풀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아스날 주장인 공격수 피에르 에메릭 오바메양(왼쪽 두번째)이 지난 2월 열린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상대에게 무리한 태클을 범해 퇴장당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아스날 주장인 공격수 피에르 에메릭 오바메양(왼쪽 두번째)이 지난 2월 열린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상대에게 무리한 태클을 범해 퇴장당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구심점의 부재는 단결성의 상실을 불러왔다. 아스날은 다른 선수들보다 되레 주장들이 먼저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다. 로랑 코시엘니가 지난해 여름 논란 속에 팀을 떠났고 주장 완장을 물려받은 자카는 홈 팬들과 욕설 섞인 언쟁을 벌였다. 그 다음 주장으로 선임된 오바메양은 이미 공격 작업 대부분에 관여하는 상황에서 주장직까지 맡아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했다. 이제 아스날은 경기 도중 부당한 판정이나 상대의 거친 플레이에 직면해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는다. 골이 터지면 기뻐하고 실점하면 사기가 크게 떨어져 경기를 그르친다. 유스팀에서나 볼 법한 팀 상황이다. 상대팀은 이를 공략해 아스날 선수들에게 거친 파울을 일삼고 심판들은 이를 모른체한다. 상대가 거칠게 나오니 아스날 선수들은 더욱 위축되고 제 플레이를 하기 꺼려한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르테타 감독이 부임한 뒤 아스날은 보다 장기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구단 유스팀 출신인 측면수비수 헥토르 베예린이 오바메양 부재시 주장 완장을 찬다. 최근에는 수비수 파블로 마리와 세드릭 소아레스, 다비드 루이스와의 계약을 연장했다. 현지에서는 이들과의 계약이 아르테타 감독의 수비진 개혁에서 큰 부분을 담당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수비 안정화를 시작으로 미드필드와 공격진까지 점진적인 개혁에 나서는 아르테타 감독이다.

아스날이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거머쥔 지도 어느덧 16년이 지났다. 순위는 갈수록 야금야금 떨어져간다. 팀은 방향성을 잃었다. 세계적인 공격수와 최고의 골키퍼를 보유했지만 경기를 이기지 못한다. 2010년대 초반까지 리버풀이 겪었던 상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리버풀이라는 확실한 가이드북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책만 본다고 모든 게 단숨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리버풀의 우승을 지켜보는 아스날 팬들에게는, 아르테타에게는, 아스날에게는 여전히 리버풀이 겪었던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