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중계 카메라맨이 지난 7월2일(현지시간) 열린 토트넘 홋스퍼와 셰필드 유나이티드 경기에 앞서 토트넘 선수들의 워밍업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방송 중계 카메라맨이 지난 7월2일(현지시간) 열린 토트넘 홋스퍼와 셰필드 유나이티드 경기에 앞서 토트넘 선수들의 워밍업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 경기 광명시에서 자취를 하는 축구팬 강모씨(30)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의 오랜 팬이다. 마침 새 시즌 개막전이 아스널과 풀럼의 대결로 잡혔다. 지난 시즌 FA컵 우승 등 좋은 팀 분위기에 절로 마음이 부푼다. 일찌감치 맥주를 사놓고 치킨을 시켜놓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번 시즌 독점 중계를 맡은 모 방송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간다. 접속이 안 된다. 검은색 화면만이 하염없이 강씨를 기다리게 한다. 급한 마음에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도 켜봤지만 사정은 마찬가지. 강씨는 경기 시작 후 약 1시간이 지나서야 식은 치킨을 먹으며 후반전을 볼 수 있었다. 

축구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스포츠 중 하나다. 즐기기 위해 큰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둥근 공 하나와 골대만 있다면 몇명이 어디에 있든 즐길 수 있다. 여러 장비나 경기장이 꼭 필요한 여타 스포츠와는 차별화된다. 축구가 세계적인 스포츠가 된 비결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축구는 점점 비싸진다. 축구를 보기 위해서는 큰 돈을 지불해야 한다. 방송사들은 매년 거액을 지불하면서 축구 중계권을 가져간다. 이 손실은 일정부분 시청자들이 감당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청자들이 축구를 보기 위해서는 이제 돈을 내야 한다. 
한국은 오랜 기간 '방송은 공짜'라는 인식이 많았다. 적은 금액의 수신료만 내면 공영방송에서 나오는 각종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1만원 안팎의 케이블TV 신청 비용이면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는 축구경기를 생중계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축구는 비싸졌다. 이같은 추세는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같은 추세에 맞춰갈 준비가 정말 됐을까.

EPL 중계권료 연 4조원 '훌쩍'… 영국外 중계권료 급등 추세

지난 2016년 영국 리버풀 안필드에서 열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과 아스널의 경기를 중계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지난 2016년 영국 리버풀 안필드에서 열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과 아스널의 경기를 중계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축구가 비싸졌다'는 말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곳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다. 지난 1992년 출범한 프리미어리그는 3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가 됐다. 이는 비단 영국을 넘어 전세계 많은 축구팬들이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고 싶어하게 됐다는 의미다.
수요가 늘면서 이에 대한 금액도 점점 올랐다. 송출 범위가 넓어지면서 프리미어리그 중계권은 해를 거듭할수록 상승곡선을 그렸다. 지난해 미국 'USA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프리미어리그가 지난 2019년부터 오는 2022년까지 맺은 총 중계권료 합은 92억파운드(한화 약 13조9800억원)에 이른다. 시즌당 4조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여기에 큰 영향을 끼친 건 해외중계권 계약 규모의 거대화다. '스포츠 비즈니스 인스티튜트' 자료를 보면 2001~2004년 영국 내 방송사 중계권 계약 규모는 12억파운드(약 1조7900억원)였다. 반면 해외 중계권 규모는 1억7800만파운드(2660억원)였다. 간단히 계산해도 10배 안팎의 차이가 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해외 자본이 들어오고 세계적인 선수가 모여들던 2000년대 들어 해외중계권 가격은 급등했다. 지난 2016~2019년 기간을 보면 영국 내 중계권은 51억3600만파운드(약 7조6700억원), 해외 중계권은 30억파운드(약 4조4800억원)다. 금액의 차이는 여전하지만 비율 상으로만 보면 해외 중계권료가 거의 근접하게 치고 올라왔다. 

지난해 새로 거래된 프리미어리그 중계권료의 경우 해외 계약 규모가 42억파운드(약 6조3800억원)로 훌쩍 뛰어올랐다. 해외 중계권 계약이 프리미어리그에 끼치는 영향력이 날로 커짐을 방증한다. 단순히 영국 내 방송사가 거액을 지불하는 걸 넘어 세계적으로 방송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뛰어드는 추세가 됐다.

지난 1992년부터 2019년까지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영국 내, 해외 중계권료는 나란히 불어났다. /사진=스포츠 비즈니스 인스티튜트 자료
지난 1992년부터 2019년까지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영국 내, 해외 중계권료는 나란히 불어났다. /사진=스포츠 비즈니스 인스티튜트 자료
축구를 보기 위해 조 단위로 돈을 내야 하는 방송사들은 어디서 수익을 창출할까. 가장 큰 비율은 광고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프리미어리그 방송으로 몰려든다. 광고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비교 기준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과거 첼시의 유니폼 메인 스폰서였던 삼성의 경우 2004년 19.7%였던 유럽 내 브랜드 인지도가 2009년 49.6%까지 치솟았다는 자료도 있다. 지출한 중계권료의 대부분은 이같은 기업들의 광고 수익으로 매워진다.
또다른 주요 수익원은 시청자들의 수신료다. 영국 내 중계 대부분을 도맡는 스카이스포츠의 경우 시청자들은 시즌당 146경기의 프리미어리그 경기 시청을 위해 매달 18파운드(약 2만7000원)를 내야한다. 이보다 많은 207경기 생중계를 보고자 한다면 월 40파운드(약 5만9000원)까지 치솟는다.

물론 이 금액에는 프리미어리그 외에 다른 스포츠 경기 시청도 가격에 포함된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결코 저렴하지는 않은 액수다. 많은 수의 영국 현지 축구팬들이 프리미어리그를 집에서 TV로 보는 것이 아니라 중계를 틀어주는 펍(술집)으로 가서 시청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가격도 한몫 한다. 물론 이 펍들도 모두 수신료를 내고 중계를 틀어준다. 최소한 영국에서는, 축구를 무료로 보는 일은 없다.

우리는 유료중계를 볼, 할 준비가 됐는가

영국 현지 중계카메라가 지난 6월24일(현지시간) 열린 울버햄튼과 본머스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영국 현지 중계카메라가 지난 6월24일(현지시간) 열린 울버햄튼과 본머스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국내에서는 오랜 기간 해외축구 리그가 케이블 채널을 통해 방송됐다. 이를 보기 위해 추가로 돈을 지불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케이블 방송 계약을 할 때 자신이 보고 싶은 리그를 중계해주는 방송사가 포함됐는지만 확인하면 됐다. 이같은 케이블TV는 보통 포함된 콘텐츠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리 비싸도 2만원대를 보통 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한국 방송사가 프리미어리그 중계권을 가져오기 위해서 얼마를 지불하는 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과거 중계를 했던 방송사 관계자들은 모두 이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이 어렵다"고 답했다. 다만 프리미어리그의 전체 해외중계권 규모 등을 고려한다면 국내 방송사도 결코 헐값에 이를 들여오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같은 금액을 방송사가 단순히 광고 수익으로만 충당하기는 한계가 있다. 국내 방송시장, 특히 스포츠 중계 시장은 그 규모가 해외와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도 대부분 최고 인기 스포츠인 야구 중계에 집중돼 있다. 결국 방송사 입장에서는 갈수록 늘어나는 프리미어리그 중계권료에 따라 유료중계를 필연적으로 실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현재 국내에서 프리미어리그를 중계하는 곳은 스포티비 한 곳이다. 스포티비는 이번 시즌이 개막하기 전 손흥민이 속한 토트넘 홋스퍼의 경기를 제하고 대부분의 경기를 '독점 유료중계'로 전환했다. 스포티비는 이전부터도 최근 2~3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료중계 범위를 넓혀왔다. 이같은 변화는 갈수록 비싸지는 '축구의 값'을 염두한다면 불가피한 수순이다. 생소한 유료중계에 불만을 표하던 팬들도 어느 순간에선가 '이해할 수 있다'는 여론으로 바뀌는 추세다. 

스포티비 나우 애플리케이션 접속 화면. 스포티비 나우는 지난 12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중계 과정에서 서버에 문제가 생겨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았다. /사진=스포티비 나우 캡처
스포티비 나우 애플리케이션 접속 화면. 스포티비 나우는 지난 12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중계 과정에서 서버에 문제가 생겨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았다. /사진=스포티비 나우 캡처
팬들, 즉 시청자들의 불만은 다른 데 있다. 유료중계 그 자체가 아닌 '과연 유료중계를 할 준비가 됐는가'다. 스포티비는 점진적인 유료중계 전환 과정에서 여러 비판에 시달렸다. 중계의 질, 위성 상태, 부족한 콘텐츠가 계속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스포티비는 유명 해설위원 영입, 중계 여건 개선 등을 통해 직접적인 돌파에 나섰다. 그럼에도 이같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스포티비는 최근에도 시청자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독점 중계 발표 이후 불과 이틀 만에 방송된 2020-2021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중계 서버가 몰려든 시청자들로 인해 셧다운 된 것. 독점 중계 소식에 돈을 내고 결제를 한 시청자들은 1시간여 동안 스포티비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을 오고가며 답답함만 느껴야 했다. 스포티비는 주말이 지난 뒤에야 서버 관리 작업을 통해 급히 개선 작업에 나섰다.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 한구석에서는 공 하나만 있어도 즐길 수 있는 축구가 다른 한구석에서는 수조원대 돈을 움직이는 메가 산업이 됐다. '축구중계=무료'라는 인식도 이같은 분위기 속에 점점 세월 한 켠으로 사라지는 추세다. 하지만 무작정 유료중계를 외치기 전 과연 이같은 추세를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지, 이를 중계하는 방송사는 이런 시청자들의 니즈를 충분히 충족할 준비가 됐는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