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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은 삼성과 현대는 알지만 우리가 지원하는 아일랜드 기업들은 잘 모를 겁니다. 우리는 삼성과 현대와 같은 위대한 기업들에 핵심 기술과 부품을 공급하는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같은 회사들을 키워냅니다. 그들이 바로 아일랜드의 혁신입니다."
비내리던 지난 9월 3일(현지시간) 더블린 남쪽에 위치한 아일랜드 기업진흥청(Enterprise Ireland, 이하 EI)에서 만난 케빈 셰리(Kevin Sherry) 총괄이사는 이렇게 운을 뗐다.
로비에 들어서자 빗물이 묻은 우산을 정리하는 기자들을 향해 셰리 이사는 인사를 건내며 다가왔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둥근 얼굴, 부드러운 눈빛. 그는 자리에 앉기도 전 홍차를 따라 건넸다. 지친 취재진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모습에서 아일랜드 특유의 정(情)과 인심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셰리 이사는 EI 출범 초기부터 28년간 조직과 함께하며 아일랜드 경제 성장의 최전선을 지켜온 역사의 산 증인이다. 올해 상반기 신임 CEO(최고경영자)가 내정되기 전까지 임시 CEO를 맡은 EI 핵심 인사이기도 하다. 그는 시종일관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EI는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유치하는 투자개발청(IDA)과 함께 아일랜드 경제를 떠받치는 '쌍둥이 엔진'이다. IDA가 글로벌 기업을 아일랜드로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면, EI는 자국 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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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챔피언' 韓 대기업의 파트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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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리 이사가 언급한 것 처럼 EI가 육성하는 기업들은 B2C(기업-소비자 거래)보다 B2B(기업 간 거래)에 집중하는 '보이지 않는 챔피언'들이다. 이들은 이미 한국의 핵심 산업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아일랜드 바이오테크 기업 누리타스(Nuritas)는 CJ바이오와 손잡고 건강 기능성을 갖춘 펩타이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기업 니트(Neat)는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문서 검증 솔루션을 제공하며 품질 관리 과정에서 협력 중이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루클룬 에너지(Clune Energy)가 SK에코플랜트와 함께 연료전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핀테크 기업 트랜스퍼메이트(TransferMate)는 국내 송금 플랫폼 모인(Moin)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금융 소프트웨어 회사 파네르고(Fenergo) 역시 국내 은행권에 KYC(고객확인)와 사이버보안 솔루션을 공급하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숫자에서도 EI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EI가 지원하는 4500여개 기업이 직접 고용한 인원은 23만5000명에 달한다. 이는 아일랜드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전체의 고용 규모와 맞먹는 수준이다. 셰리 이사는 "이들이 아일랜드 경제에 지출하는 금액 역시 다국적 기업과 비슷하다"며 토종 기업 생태계의 힘을 강조했다.
EI의 자신감은 미래 전략에서도 드러난다. 고성장 스타트업 1000개를 발굴하고, 자국 기업 수출액을 500억유로(약 82조원)까지 늘리며 연간 20억유로(약 3조원)의 R&D(연구개발) 투자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EI는 해마다 약 5억7000만유로(약 85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대학의 연구성과 상업화와 벤처펀드 출자 등 혁신 생태계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EI는 다양성과 지속가능성(ESG)을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삼는다. 여성 기업가 육성 정책이 대표적이다. 셰리 이사는 "2012년만 해도 여성 창업가 비율이 7%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30%로 4배 이상 늘었다"고 소개했다.
그 비결을 묻자 "단순히 여성 창업가를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여성 멘토링과 전용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만든 것은 물론 우리가 투자하는 VC 펀드에 '투자심사팀의 성별 다양성'을 갖추도록 요구했다"며 "하나의 정책이 아닌 생태계 전체를 바꾸는 다각적인 접근이 변화를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규제 대신 사람을 키운다… 아일랜드 혁신의 '휴먼 네트워크'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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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의 혁신 DNA는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기술만 키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모으고 아이디어가 튀어나올 무대를 만들어주는 데 능하다. 그 대표작이 더블린대학(UCD)에 자리 잡은 창업 허브 '노바UCD'(NovaUCD)다.
EI는 연구실에서 탄생한 아이디어가 그냥 논문으로 끝나지 않고 창업으로 이어지도록 NovaUCD를 세웠다. EI가 초기 자금과 멘토링을 얹어주자 캠퍼스 한쪽이 젊은 창업가들의 놀이터로 변신했다.
EI의 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NovaUCD에서 성장한 기업은 다시 EI의 지원을 받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다. 아일랜드의 작은 스타트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순간이다. 이는 아일랜드 혁신이 제도나 정책이 아닌, 사람과 네트워크를 토대로 뿌리내려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셰리 이사는 다시 한번 "비즈니스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아일랜드 기업가들이 전 세계인들과 연결되고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넘어 친구가 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한국의 혁신 생태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그는 "한국은 이미 세계를 선도하는 환상적인 기업들을 보유한 나라"라고 치켜세우면서도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셰리 이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 우리를 다음 목적지로 데려다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AI 같은 파괴적 기술을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EI 본사 곳곳에 걸린 슬로건 'Helping Irish business go global'(아일랜드 기업을 세계로)은 단순한 문구를 넘어 자국 기업을 글로벌 무대에 세우겠다는 이들의 야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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